우리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특정한 종류의 감각에 대해 어느 정도 일정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세상을 이해합니다. 식물들은 빛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자기력에 민감한 아메바는 북극을 향해 몸을 움직입니다. 피리새의 새끼는 둥지에 있는 동안 별들의 움직임을 배워서 밤에도 길을 잃지 않고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박쥐는 소리에, 상어는 냄새에 반응하며, 맹금류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력이 발달했습니다. 각각의 종은 그 감각 장치가 제공하는 정보에 따라 환경을 경험하고 이해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우리의 유전자가 제공해온 제한된 세계관에 덧붙여서, 상징에 의해 전달되는 정보에 바탕을 둔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유클리드와 그의 후학은 자연에서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수평선을 가정함으로써, 육안과 두뇌가 얻을 수 있는 정보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공간을 표시할 수 있는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분야는 서로 다르지만 서정시와 자기공명 분광학은 모두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정보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상징에 의해 전달되는 지식은 체계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염색체 안에 새겨진 화학기호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배우고 전수받는 지식입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문화가 바로 이러한 체외적인 정보입니다. 그리고 상징에 의해 전달되는 지식은 기하학, 음악, 종교, 법률과 같은 세부 영역으로 나뉘어집니다. 각각의 영역은 그 자체의 상징적 요소와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독립된 표기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각각의 영역은 고립되고 작은 세계 안에서 분명하고 집중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마도 인간의 창의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일면일 것입니다. 계산법과 음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생물학적 진화에 의해 유전자 속에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유형의 질서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영역의 규칙들을 배우면 우리는 즉시 생물체의 경계를 넘어서 문화적 진보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각각의 영역은 개체로서 한계를 확장하고 우리의 감각과 능력을 확대해서 세상과 연결시킵니다. 우리는 그러한 규칙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잠재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새로운 힘을 부여하는 무수히 많은 영역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많은 영역들 중 어느 하나도 배워보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생물적 존재의 속박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한번쯤 반성해 볼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영역은 우선적 생계를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능력과 소득의 정도를 감안해서 간호학, 배관, 약학, 경영학 등을 선택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강력한 소명에 의해 특정한 영역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개 창의적인 사람들이 이런 그룹에 속합니다. 이들은 영역과 완벽하게 궁합이 맞기 때문에 영역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 그 길을 걸어갑니다.
영역은 무수히 다양하지만, 사람들이 영역 자체를 추구하는 이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핵물리학, 미생물학, 시, 작곡 등에서 사용하는 상징과 규칙은 공통점이 없지만, 각각의 영역에서 일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소명감은 종종 놀랍게도 유사합니다. 가장 공통적인 주제는 우리의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고, 사후에도 지속되는 무언가를 만들어냄으로써 인류가 지금보다 더 큰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기여한다는 것입니다.
기요르기 팔루디는 일곱 살의 나이에 시인이 되고자 결심한 이유를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죠.” 그는 언어를 통해 시인의 육체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 73년 인생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준 도전과 희망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마찰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물리학자 존바딘의 초전도에 관한 연구, 핵에너지로 무제한의 동력을 공급하겠다는 물리학자 하인즈 마이어 라이프니츠의 희망, 또는 생명의 진화를 이해하려는 생화학 물리학자인 맨프레드 아이겐의 시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영역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의 탐구는 몇 가지 주제로 수렴됩니다. 절대자를 이해하려는 막스 프랭크의 집념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가장 인간적인 소망이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영역은 몇 가지 방식으로 창의성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저해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구조적인 명료성, 문화 내의 구심성 그리고 접근가능성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제약 회사인 A와 B가 같은 시장에서 경쟁을 하고 있다고 합시다. 두 회사에서 연구와 개발에 투자하는 돈의 액수나 연구자들의 창의적 잠재력이 동일하다고 할 때, A회사와 B회사 중 누가 더 효과적인 신약을 개발할 것인지 예상해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회사가 의약지식에 관한 보다 상세한 자료를 갖고 있는가? 그 자료는 어느 회사가 더 체계적인가? 어느 회사에서 의약지식을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느 회사가 직원들에게 지식을 좀 더 잘 보급하고 있는가? 가설을 실험하기 쉬운 곳은 어느 회사인가? 만일 다른 조건이 모두 동일하다면, 지식이 보다 체계적이고, 핵심적이며, 접근하기 쉬운 회사에서 창의적인 발견이 가능할 것이다.
종종 수학이나 음악과 같은 영역에서 미술이나 철학과 같은 영역에서보다 뛰어난 인재가 좀더 일찍 두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또한, 영역에서는 젊은이들이 더 창의적인 반면에, 또 다른 영역에서는 연장자들이 좀더 우세합니다. 수학의 천재성은 이십 대에 물리학의 천재성은 삼십 대에 절정에 도달하지만, 위대한 철학은 대개 생의 후반에 성취됩니다.
이런 차이는 그 영역의 구조적인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학의 상징 체계는 비교적 견고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수학의 체계는 엄격한 내부 논리를 적용하고, 명확성을 극대화하며, 오차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젊은이라 해도 그 규칙을 신속하게 이해한다면 단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같은 구조적인 이유에서, 어떤 새로운 이론이 제기되면 - 1993년 비교적 젊은 수학자가 오랜 세월 풀 수 없었던 ‘페르마의 미자막 정리’를 증명한 것처럼 - 그것은 즉시 주목을 받고, 적절하다고 판단되면 현장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반면, 사회과학자나 철학자가 영역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 걸리며, 설령 새로운 사상을 발표한다고 해도 현장에서 인정을 받을 때까지는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합니다.
하인즈 마이어 라이프니츠는 그가 뮌헨에서 지도했던 소규모 물리학 세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날 한 대학원생이 칠판에 아원자의 운동을 설명하는 새로운 공식을 써 내려갔습니다. 교수는 그 공식이 새로운 진전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학생을 칭찬했습니다.
주말이 되자 독일의 다른 대학에 있는 물리학자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학생이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 다음 주에는 미국 동부 연안의 대학에서도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두 주 후에는 칼테크, 버클리, 스탠포드의 교수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내가 연구하는 심리학 분야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아직까지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만일 어느 학생이 명문 대학의 심리학 세미나에서 아무리 심오한 생각을 언급했다 해도, 잔잔한 파문조차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심리학도가 물리학도보다 덜 똑똑하거나 덜 독창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동료나 내가 학생의 새로운 생각에 대해 관심을 덜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고도로 체계화된 영역들 중에서 심리학은 예외적으로 매우 포괄적인 사고체계를 요구하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새롭고 중요하다고 인정받을만한 이론을 발표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집중적으로 글을 써서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이어 라이프니츠의 수업에서 발표를 했던 그 젊은 학생은 결국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지만, 심리학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좀더 체계적인 영역이 포괄적인 영역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지극히 체계적인 영역인 미시경제학이나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윤리학이나 지혜로움보다 더 발전된 영역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요즘은 경계가 분명하면서 규칙이 좀더 명확하고 양적 측정이 가능한 영역이 좀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학에서도 그런 학과들이 후원금을 받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또한 구분이 분명한 영역에서는 교수를 승진시키기도 쉽습니다. 캥거루쥐의 교미 습성에 대한 연구나 드라비다 언어에 가정법 사용에 대한 연구결과를 가지고 10개 대학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성 발달에 대한 연구에 관련해서 세계적인 권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열 명의 학자가 동의하기는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성 발달에 대한 연구가 캥거루쥐의 교미 습성에 대한 연구보다 과학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엉뚱한 오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풍토에서는 분명 양적 측정이 가능한 영역이 그렇지 못한 영역보다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진짜라고 믿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을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지능지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적 능력을 테스트에 의해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구 얼마나 감성적이며 이타적이며 협조적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면들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 이러한 편견은 사회의 진보와 업적을 정의하는 문제처럼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미래학자인 헤이즐 핸더슨은 전 세계의 정부로 하여금 측정이 어려운 문제들까지 국민총생산에 합산하도록 납득시키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녀는 오염, 자연자원의 파괴, 삶의 질 하락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인간의 희생을 GNP에 계산해넣지 않는 것은 현실을 완전히 왜곡시켜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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