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현장, 개인의 조화가 이뤄낸 창의성의 좋은 예를 1400년과 1425년 사이 유럽의 플로렌스(피렌체의 영문명으로 로마제국 시대의 카이사르가 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꽃 피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플로렌티아’라는 도시명 지었습니다) 지역에서 창의적인 미술이 갑작스럽게 꽃 피운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는 르네상스의 황금기였으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새로운 미술품이 탄생한 시기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건축된 대성당의 돔, 기베르티가 세례당에 조각한 <천국의 문>, 오르산미켈레 성당에 설치된 도나텔로의 조각들, 마사치오가 브랑카치 성당에 그린 프레스코 벽화, 그리고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가 트리니티 교회에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 등은 모두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미술의 부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만일 창의성이 전적으로 개인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14세기 초반에 플로렌스에서 유난히 많은 창의적 미술가가 출현한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당시에 어떤 유전적인 돌연변이가 일어났거나, 플로렌스의 개혁적인 교육정책이 갑자기 아이들을 좀더 창의적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영역과 현장에 관련해서 설명하는 쪽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영역에 관한 한, 르네상스는 수세기에 걸친 소위 암흑시대 동안 잊혀졌던 고대 로마의 건축과 조각 방식이 재발견된 시기였습니다. 1,300년대 말에 로마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에서 학자들이 고대 유적을 발굴하고 그 양식과 기술을 분석, 모사해냈습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준비작업은 15세기 초에 장인들과 공예가들이 오랫동안 잊혀졌던 지식들을 되찾으면서 차츰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플로렌스의 대성당인 산타마리아 노벨라는 거대한 후진에 돔을 얹을 방법을 찾지 못해 무려 80년 동안 하늘을 향해 열린 채로 방치되었습니다. 매년 젊은 미술가들과 숙련된 건축가들이 성당 건축을 감독하는 위원회, 오페라 델 두오모에 계획서를 제출했지만 모두 실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인문학자가 로마의 판테온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 거대한 건축물의 돔을 측정하고 분석하게 되었습니다.
판테온은 2세기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는데, 돔의 높이가 약 21.6미터, 직경은 약 43.3미터에 달했습니다. 천 년 이상 그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돔은 이어지지 않았고, 로마인들의 건축 기술은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잊혀졌습니다.
1401년,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를 방문해 유물들을 조사하다가 판테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플로렌스 성당의 돔을 완성하기 위한 그의 아이디어는 트러스트를 버릴 수 있는 내부 석조 구조물에 기본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디자인은 로마양식의 재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로마 이후의 모든 건축, 특히 고딕 양식의 건축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위원회에서는 그의 설계도가 실행 가능하며 훌륭한 해결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돔은 그 이후 수많은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새로운 양식이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돔을 기초로 해서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의 둥근 천장을 설계했습니다.
전통적인 미술양식의 재발견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플로렌스의 르네상스를 갑작스러운 정보의 활용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고대양식에 접한 다른 모든 도시에서도 새로운 미술양식이 꽃을 피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어느 곳도 미술적인 업적의 강도와 깊이에서 플로렌스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고대미술 영역의 재발견과 때맞추어, 플로렌스가 미술의 현장으로서 새로운 미술품의 창조에 매우 접합한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플로렌스는 처음에는 교역을 통해, 그 후에는 양모업과 다른 섬유업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부유한 상인들을 통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14세기 말에는 메디치가를 포함한 12개의 주요 은행이 외국의 왕들과 세력가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매년 상당한 이자를 받고 있었습니다.
은행가들의 금고가 점점 채워지고 있었던 반면, 도시 자체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착취를 당했고 경제적인 불평등에 의해 야기되는 정치적 긴장은 언제라도 공개적인 투쟁으로 발전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교황과 황제 간의 갈등이 전 대륙을 둘로 갈라놓으면서 교황을 추종하는 세력과 황제당원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도 도식의 지도자들은 플로렌스를 기독교 국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 그들의 말로 하자면 ‘새로운 아테네’ - 만들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웅장한 교회와 아름다운 다리, 화려한 궁정을 건축하고 거대한 변화와 위풍당당한 조각상을 주문하면서, 자신들의 가정과 사업장에 보호막을 쌓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런 느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500년 후, 히틀러는 후퇴하는 독일 군에게 아르노의 다리를 폭파해서 주변 도시를 초토화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현지 사령관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파괴해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결국 그 도시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플로렌스의 은행가들, 성직자들 그리고 위대한 장인들이 그들의 도시를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꾸미고자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돈을 내놓고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술가를 격려하고 평가했으며,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미술가들이 능력 이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도 그들의 작업 결과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원회 구성원들의 지속적인 격려와 관심이 없었다면 대성당의 돔은 건설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플로렌스에서 미술 현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또 다른 예는 세례당의 북쪽 문과 동쪽 문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동쪽 문을 보고 과연 <천국의 문>이 될 만하다고 단언했습니다. 대성당인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돔과 마찬기지로 성당의 문을 만들고, 이를 감독하기 위해 특별 이사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이사회는 각각의 문을 청동으로 주조하고 10개의 패널에 구약의 주제들을 보여주는 조각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유럽에서 가장 이름난 철학자, 작가, 성직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성경의 어떤 장면을 패널에 넣을 것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물었습니다. 답장이 오자 그들은 문을 만드는 설명서를 작성해 경연대회를 열었습니다.
이사회에 제출된 수십 가지의 그림 주에서 다섯 작품이 선정되었고, 그 중에서는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도 있었습니다. 결승에 오른 다섯 명에게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402년, 새로운 출품작을 평가하기 위해 소집된 심사단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고전적인 구성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 뛰어난 기베르티의 패널을 선택했습니다.
로렌조 기베르티는 당시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그는 그 후로 20년 동안 북쪽 문을 만들었고, 다시 27년이라는 세월을 그 유명한 동쪽 문을 완성하는데 보냈습니다. 물론 그동안 메디치, 파지스, 상업은행가 조합과 그 밖에 명문가가 주문한 조각상도 완성했지만, 그의 명성은 서구 세계의 장식미술 개념을 뒤바꿔 놓은 <천국의 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플로렌스의 위대한 미술품들이 단지 전통미술의 재발견이나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 지도자들의 의지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미술가들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 중심에 산타마리아 노벨라 위에 돔을 얹은 브루넬레스키와 <천국의 문>에 평생을 바친 기베르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과거의 원형들과 도시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들의 업적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그 두 미술가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대신해서 현장과 영역의 적절한 뒷받침에 힘입어 돔과 문을 건설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불과분의 관련성 때문에 창의성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어떤 체계 내부의 관계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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