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예술적인 착상은 비시각적인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 역시 아인슈타인이나 매클린턱 같은 과학자들처럼 '전달할 수 있는 표현 수단으로 번역(translation)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래의 사례들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는 이 변환에 대해 간결한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술이란 물질적인 사실과 영적인 효과 사이의 불일치이며 삶에 대한 반응을 시각적 공식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이는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ois)의 관점과 비슷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깊이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말해야 할 것을, 또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나는 내가 할 말을 조각으로 치환하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화가 막스 빌(Max Bill) 역시 예술의 목적을 언급하면서 "예술이란 인간 정신의 표현이며,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는 막연한 심상을 구체적인 형태로 가시화시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림이나 스케치는 색과 공간과 빛과 움직임을 수단으로 삼아 어떤 것을 구체화하는 도구다"라고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쓰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나는 깨달았다. 내가 보고 즐긴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놓는다 하더라도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을 관람객들에게 그대로 다시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나는 내가 받았던 느낌과 똑같은 것을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이것은 복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이러한 말은 결국 예술이 제시하는 이미지가 어떤 느낌이나 개념, 감각이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과학자가 창안한 공식이 그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말과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사람들도 말(언어)만 가지고 사고하거나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소설가 도로시 캔필드 피셔(Dorothy Canfield Fisher)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떤 장면을 강렬한 이미지로 만들어 낸다. 만일 그 장면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이미지로 형상화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장소와 사람들, 삶에 대해 글을 쓰지 못할 거라는 뜻이다."
작가 이사벨 아옌데(Isabell Allende)의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책은 내 마음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뱃속 어딘가에서 떠오른다. 그것은 내가 접근하지 못한 대단히 어둡고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져 있으며 내가 그저 모호한 느낌으로만 짐작하는 것, 아직 형체도 이름도 색깔도 목소리도 없는 그런 것이다." 처음 경험한 충동이나 영상, 느낌을 말로 나타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그것들은 말로 표현됩니다. 시인과 작가들이 이미지와 느낌을 재현하면서 겪게 되는 문제를 과학자들과 예술가들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내적인 느낌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외적인 언어로 변환(번역)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SF 소설가인 어슐라 르귄(Ursla LeGuin)은 소설가들이 이러한 변환을 시도할 때 나타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설가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써' 다룬다. 그런데 그들의 전달 매체는 소설이다. 소설은 말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말은 역설적으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말에는 기호 언어적 용법과 함께 상징적, 혹은 은유적 용법이 있기 때문이다." 즉, 말은 내적인 느낌을 문자로 꾸밈없이 나타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표현하는 기호일 뿐 그 느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말은 이해를 위한 표현수단이지 느낌의 구현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학비평가 스티븐 스펜더(Stephen Spender)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단지 암시된 어떤 것을 단어를 가지고 나타내려는 시도야말로 "시가 행하는 무시무시한 도전"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쓰고 싶은 시를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쓴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다가오는 내적인 느낌을 심상으로 만들어 이를 체험해야 한다는 말일 텐데, 그런 노력이야말로 일생에 걸쳐 얼마나 큰 인내와 관찰력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미지의 논리', '심상의 체험', '상상하는 삶이 요구하는 인내와 관찰', 이런 말들을 스타니슬라브 울람(Stanislaw Ulam)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초(超) 논리'가 보다 적절한 이름일 것입니다. 이것들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각과 개념을 발생시킬 뿐, 그것들의 타당성이나 유용성을 보장하진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아직 제대로 연구된 바 없습니다. 그저 공식적인 의사소통 언어라기보다는 비 수학적이며 비언어적이고 비기호적이라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울람의 말이 옳다면 그 결과는 수천 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체계화한 상징논리학만큼 혁명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초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적용되는 '밖으로 분명히 드러나 있는 생각'의 기원과 특질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초 논리에 대해 현재 가장 근접한 개념은 '직관'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오직 직관만이 교감을 통하여 통찰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연구의 성과는 면밀한 의도나 계획에서 오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과학자에게 예술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실로 과학자와 예술가는 친척관계라고 해도 무방한데, 왜냐하면 그들의 통찰은 느낌과 직관의 영역에서 발생하여 동일한 창조적 경로를 거쳐 의식 속에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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